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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사에서의 차 한잔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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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3-08-03 00: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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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의 차 한잔  
 
지금부터 30 여 년 전 대학시절 미술과 학생들과 함께 고창 선운사에 갔던 일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백파 선사비를 탁본하러 가는 길 이었다. 선운사 경내를 돌아보고 승방 툇마루에 앉았는데 한 스님으로부터 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스님께서 내어주시는 흰 백자 찻잔에 담긴 노란 단풍잎 빛깔의 차향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을비가 내리는 조용한 절 경내와 함께 아련하고도 비릿한 향으로 남아있다. 스님께 여쭈니 그 차는 작설차로, 이곳 고창 선운사가 차가 재배되는 북방 한계선이라 시며 한지로 만든 편지봉투 같은 것에 차를 담아 선물로 주셨다. 배낭에 차 봉지를 넣고 감사말씀을 드리고 예의 그 백파 선사비로 향했다. 우리는 비문의 내용보다는 단지, 추사의 서체를 탁본하여 족자라도 하나 만들어 보려는 욕심에 비석에 물을 뿜고 한지를 대고 솜방망이를 두드려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정에 쫓기어 부랴부랴 산문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흠뻑 젖고 말았다. 스님께서 주신 작설차 봉지 또한 이미 비에 젖어 찬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 찻봉지는 버려졌고, 이렇게 나와 차의 첫 번째 인연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2년 후 난 일본의 한 차회에서 차 선생으로부터 일본차의 원료가 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어디를 가나 한국의 찻그릇이 그들의 차 문화 속에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더욱이 최고의 찻그릇은 조선의 찻그릇이라는 사실이 당시 나로서는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때 비로소 2년 전 선운사에서 한 스님이 내어주신 한 잔의 작설차가 내가 받은 최고의 차 대접이었으며, 한국인의 격조 높은 차 문화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일본 각지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 도자기 자료관에 놓여있는 조선의 차 그릇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가나자와 대학에서 무심코 만든 찻그릇이 너무 투박하고 무거워서 학교 쓰레기장에 버렸는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그것을 주워 와서 나에게 이것처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청년의 손으로 빚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소중이 여길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나 보다. 한국으로 돌아와, 분원 근처에 도자기 작업장을 만들고 조선백자의 파편을 살펴보며 한편으로는 서리로, 고흥으로, 진주로, 해남으로 고 도요지를 답사하러 다녔다. 고 도요지를 답사하러 다녔다. 그곳 골동품 가게의 옛 그릇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나에게 항상 가슴 설레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나는 우연히도 아름다운 찻그릇을 얻게 되었다. 두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뽀얀 살빛의 가볍고도 부드러운 단단한 그릇은 남도의 가락처럼 유려한 곡선과 당당함으로 조선의 분원백자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이 그릇을 가까이 놓고 보고 만지며 차 그릇으로 쓰고 있다.

근래에는 많은 도예가들이 찻그릇을 만들고 차 생활이 많이 일반화 되었으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본디 우리의 차 생활은, 그렇게 유난스럽거나 번잡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찻그릇이 기기괴괴한 것도 있고 차에 대한 이론도 분분하다. 맑은 물로 한잔 차를 우려 번잡하지 않은 그릇에 담아 마실 수 있다면, 그릇의 형태나 크기나 색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다. 찻잔은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은 것이 좋고, 또한 그릇을 만드는 이의 안목과 재능이 있다면 능히 그 재료를 소화해낼 수 있으므로, 그릇을 만드는 흙이 특정한 곳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어도 좋다. 차를 마시는 이의 느낌에 따라 향기롭되, 너무 진하지 않게 하면 좋고 또한 손님을 대접할 때는 차를 내는 사람은 마시는 이에 따라 차를 내는 속도를 조절하여야 하며, 지나치게 강요하여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차를 내는 방은, 그곳이 양식이던 한식이던 간에 정갈하고 깨끗하면 될 것이며 너무 인위적으로 꽃이나 그림 글씨 등으로 치장하지 말고 평소 아끼는 도자기나 간소한 그림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나 이 또한 없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작은 공간과 소박한 치장이 오히려 무욕의 삶을 배울 수 있다. 벽이나 바닥은 가급적 밝게 하고, 물을 끓이는 주전자도 집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무방하다. 이렇게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그대로 자신의 안목과 문화적 취향으로 차 생활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고즈녁한 남도의 산사를 찾아 나에게 한잔 차를 끓여주신 옛 스님을 그리며 차 한 잔을 마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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